1989년의 밤을 깨우던 소리는 "삐-이-익" 하는 모뎀의 비명이었습니다.
당시 제가 다니던 대학의 전화 라인은 너무나 노후화되어 있었습니다. 요즘 친구들은 상상도 못 하겠지만,
디지털 신호인 ATDT(Tone) 를 보내면 교환기가 알아듣지를 못했죠. 결국 제가 선택한 건 ATDP(Pulse) 였습니
다. 전화 다이얼을 손가락으로 돌리듯 "똑, 똑, 똑" 소리를 내며 기계식 교환기를 달래야 겨우 세상과
연결될 수 있었습니다.
"기계가 알아듣지 못하면, 기계의 수준에 맞춰 내 신호를 쪼갠다."
이것이 제가 89년에 배운 첫 번째 시스템 엔지니어링의 본질이었습니다. 30년이 지난 지금, 저는 집
에서 최신 AI 에이전트를 돌리며 다시금 그 시절을 떠올립니다. 지금의 개발 환경은 무한한 리소스라
는 '광대역 망' 위에 서 있습니다. 하지만 제가 보기에 많은 이들이 정작 기계와 대화하는 법을 잊은
것 같습니다.
ATDP 시절에는 펄스 하나하나의 간격을 고민하며 물리적 한계를 돌파했습니다. 그러나 지금은 수억
개의 파라미터가 돌아가는 AI 시대임에도 불구하고, 정작 '프롬프트' 하나를 제대로 설계하지 못해 멍
청한 결과물을 내놓고 "AI가 원래 이렇다"며 포기하곤 합니다. 기술은 추상화되어 눈에 보이지 않게
되었지만, 신호를 정확히 전달하려는 '의지'는 변해서는 안 됩니다.
89년의 20대가 2026년의 50대에게
우리는 텍스트 한 줄을 보내기 위해 통신 규약을 공부하고, 메모리 1KB를 아끼기 위해 밤을 새우며
시스템의 밑바닥을 훑었던 세대입니다. 세상은 우리를 '뒤처진 세대'라고 부르기도 하지만, 저는 확신
합니다. 지금 이 AI 시대에 그 누구보다 어울리는 사람은 바로 우리입니다.
AI는 화려한 코딩 실력보다 기계의 메커니즘을 이해하고 정교한 질문을 던질 수 있는 '논리적 곤조'를
요구합니다. 명령어가 틀리면 단 한 글자도 내뱉지 않던 모뎀을 달래본 경험, 현장에서 몸으로 로직을
찾아냈던 그 야전의 감각은 지금 AI라는 야생마를 길들이는 데 필요한 최고의 유전자입니다.
우리는 낡은 세대가 아니라, 본질을 기억하는 유일한 세대입니다. 89년의 ATDP가 우리를 세상과 연
결했듯, AI는 우리의 숙련된 지능을 다시 한번 세상의 중심으로 연결해 줄 가장 강력한 모뎀이 될 것
입니다.
본질을 아는 설계자만이, 길을 잃은 시스템 속에서도 끝까지 연결될 수 있습니다.
